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문단 편집) == 역사 == 독립전쟁이 끝나고 1949년 12월 출범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의 내각은 처음에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비공화국 지역 간 균형을 고려하여, 공화국 계열 인사 11명과 비공화국 인사 5명으로 구성되었다. 비공화국 인사 가운데는 친네덜란드파인 [[폰티아낙 술탄국|폰티아낙 술탄]] 하밋(하미드) 2세(Hamid II)도 있었다. 그러나 견해 일치 없이 억지로 모인 내각 내부에서는 공화국과 비공화국 간 갈등이 심각했다. 하밋 2세는 급기야 연방 내에서 비공화국 지역의 입지를 보장할 수단으로 공화국 지도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한편 독립전쟁 당시 남술라웨시에서의 가혹한 진압 작전으로 유명한 라이몬트 피에르 파울 베스테를링(Raymond Pierre Paul Westerling, 1919 ~ 1987)은 1949년 1월 공식적으로 제대한 후에도 독자적으로 2천 명 규모의 반공화국 민병대, 즉 공의의 군주 부대(APRA)를 이끌고 있었다. 하밋 2세는 베스테를링과 접촉하고, APRA가 벌이는 반공화국 활동을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베스테를링과 APRA의 활동이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음을 감지하고 APRA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베스테를링은 APRA를 서부자바(파순단) 지역의 정규군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를 포함해 공화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APRA는 마침내 1950년 1월 22일 밤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APRA의 계획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인도네시아 군과 경찰을 쉽게 무찌르고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당시는 독립전쟁 종전 후 1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인도네시아군의 조직이 진행되면서 잠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과 불편한 동거 중이었다. 구 동인도군이 최종 해산된 것은 1950년 7월이었다.]의 묵인 내지 협조를 얻어 반둥과 자카르타에서 주요 행정 시설을 빠르게 접수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킨다는 것이었다. 공화국 측은 첩보로 이미 APRA 쿠데타의 계획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APRA는 쿠데타 개시 직후 반둥 주둔 인도네시아군 부대를 빠르게 공격해 인도네시아군 94명을 사살하고 반둥을 점령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구 동인도군 지휘관들 대부분은 쿠데타를 일으킨 APRA에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APRA의 작전이 틀어졌다. APRA 부대는 자카르타로 접근했지만, 1월 23일 새벽으로 계획한 자카르타 공격은 동인도군의 지원을 받지 못해 늦춰지다 지리멸렬해졌다. APRA는 구 동인도군과 협상한 끝에 더 이상의 소득 없이 반둥을 버리고 바로 후퇴해야 했고, 반둥은 23일 17시까지 공화국군이 다시 접수했다. 쿠데타 시도는 이렇게 용두사미로 끝났고, 2월까지 APRA 잔당은 공화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쿠데타 수괴 베스테를링은 네덜란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싱가포르로 도주했다가 다시 네덜란드 본국으로 망명했다. 쿠데타에 동조한 폰티아낙 술탄은 체포되었고, 4월 19일 반둥-자카르타 쿠데타에 본인이 연루되었음을 실토했다. 결국 이 쿠데타로 인해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 반공화국파의 세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반대로 공화국은 대중들과 의회의 지지를 얻어 비공화국 지역을 빠르게 흡수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하밋 2세가 다스리던 특별 자치 지역 서칼리만탄을 비롯한 비공화국 지역은 8월까지 모두 공화국으로 합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